2009년 11월 20일
조선 '근대화' 담론의 이해
‘한국근대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한국의 근대가 어느 시기인지 혼란스러웠다. ‘근대’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가지고 있는 시기가 한국사에서는 언제부터 형성이 되어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제 강점기 직전의 조선왕조까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때로는 일제 강점기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시작 시기 역시 실학이 형성되어져 가는 시기, 강화도 조약, 혹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등 논란이 다양하다. 이렇게 ‘한국의 근대’라는 단어는 그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학계에선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근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는 구체적으로 국민국가의 성립,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시민사회, 이성과 과학기술의 발달, 그로부터 야기된 세속화, 도시화 등을 이뤄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어원상 "Modern'은 Ancient'에 대립되는 의미로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이른 ‘오래된 것’에 대립되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 ‘오래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의미한다. ‘근대’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과거와의 단절, 진보, 발전 그리고 혁신 등의 개념이 새로운 시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근대화’는 문을 넘으면 근대, 넘지 못하면 전근대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학계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조선은 이러한 과정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 흡수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자주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고, 뉴라이트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에 의해서 근대성이라는 과정을 이뤄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이들 모두 한국에게 근대화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서 근대화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음을 주장 속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근대화’를 이뤄낸 국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몇몇 국가밖에 되질 않는다. 근대화의 표본이자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경우, 여왕이 존재했으며 영국의 근대화 과정은 농민을 실업자로 만드는 잔혹한 ‘인클로저 운동’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전제정치를 경험한 뒤 나폴레옹이 자유를 유럽대륙에 전파한다는 명분 아래 황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교황과 왕과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아래 묶였으며 스페인은 이러한 세력들로 인한 심각한 내전을 경험했다. 러시아는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미국은 전제주의 성격을 가진 남부와 자유주의 성격을 가진 북부와의 남북 전쟁이 있었고,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에 합병이 되었으며, 독일과 일본은 나치즘과 군국주의를 경험하고 이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이렇게 당시 국가들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말하는 ‘근대화’라는 시험을 통과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근대화의 실패’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의 한국 역시도 ‘근대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 ‘전근대’와 ‘근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탈근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한국사학계가 말하는 ‘근대화’라는 것을 이룬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작은 사건이나 단어 하나로도 크게 논쟁을 벌이고 민감한 모습을 취하던 한국의 사학계의 모습으로서는 이 ‘근대화’라는 단어 역시 크게 논쟁이 일어나고 적당한 단어로 대체가 되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심각하게 ‘근대화’ 담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이 비정상적인 ‘근대화’ 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볼까 한다.
‘근대화’ 담론의 탄생과 역사
영어에서 'civilize‘라는 단어는 17세기에 나타났고, 이 단어는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된 프랑스어 ’civiliser'에서 따온 것이다. 이 단어의 기원이 ‘도시민’ 혹은 도시의‘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civis', 'civilis'라는 사실에서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이란 도시적 삶을 의미하며 도시 밖 야만에 대한 도시 안 문명의 자기 우월감을 표현하는 단어다.
18세기 이래 문명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정치, 경제체제, 매너나 행동거지의 세련됨과 더불어 사회적 질서, 체계적 지식 및 과학과 동일시되었으며, 19세기 초에 이르면 이에 덧붙여 진보, 발전, 시민적 자질을 가진 개인들의 존재 등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영국인들이 문명화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헌법적 체제, 즉 법과 시민적 질서의 지배, 자유 무역, 상업과 경제의 발달, 기독교, 교육, 기술 발달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국인들이 제시한 문명화는 영국적 삶의 방식, 곧 모든 제도, 정치, 과학, 사회적 면에서 영국의 예를 따르고 자유주의적 심성을 가지며,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를 돕는 근면과 자조의 가치를 실천하며 차를 마시고, 남자다워지고, 분별 있는 빅토리아적 삶의 양식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은 문화(Kultur)라는 개념을 개발해 보편성을 역설하는 문명에 도전하며 개별성을 강조하였다.
일본인들은 19세기 중반 전통적으로 야만이라 칭해왔던 서양을 문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870년대 초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순방 이후 ‘문명개화’라는 말이 유행어로 떠올랐다. 그들은 서양 문명을 ‘참 문명’으로, 동양 문명을 ‘반 문명’으로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의 근대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었다. 서양과 사회와 문화, 역사적 풍토가 다른 일본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왜곡된 근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의 개별적 권리를 뜻하는 인권(불어로 droit civil)의 경우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민권(people's right)로 번역되었으며 스펜서의 Social Statics의 서명을 사회정학(社會靜學)이 아닌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로 오역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자유등과 같은 사상적 개념들에 대한 혼란 등으로 인해 사회, 문화적인 근대화는 왜곡된 근대화가 형성이 된다. 그러나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근대화가 이루어 진 것은 군대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명이라는 것은 단순한 풍속 개량이나 서양 양식의 서구적 차원이 아닌 국제법상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문명은 국가 존망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였다. 그는 일본인들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라며 일본의 목적은 독립이고 국민의 문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천명했다.
일본인들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를 이끌지 못했고 서양의 기술 혁신 등만을 따라하는 ‘문명개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의 ‘문명개화’는 ‘근대화’라는 단어보다 서구의 물질적인 측면을 모방하는 ‘서구화’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의회 제도를 만들고, 영어를 국어로 만드는 등의 문화, 정치적인 면에서 ‘근대화’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켰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사회의 하부구조만을 모방한 것일 뿐 자유와 인권이라는 상부구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은 서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를 두고 서양과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문명이 아닌 일본 문화를 찬양하게 된다.
이승만이 본 조선
조선은 서양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문명화’의 논리와 일본에서 들어온 ‘문명개화’의 논리, 그리고 기존에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오류들이 뒤섞인 이중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살펴보면 문명에 대한 관점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에서 문명개화란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여 없던 것을 만들어 내며, 있던 것을 향상시키며 좋은 것은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며 이런 문명은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화를 하지 못할 경우 국제 법에 의해 자주와 독립이 침해받을 것이라며 자주와 독립을 위한 조건으로 조선이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승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의 관점은 상당히 서구적인데, 이것은 배재학당을 통해 선교사로부터 습득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는 문명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도 강하면서 윤리, 도덕적으로도 정의로운 존재들로 보고 따라서 문명국가가 비문명국들에게 간섭하는 건 당연한 일로 보고 있다. 한 예로 과거 미개한 사회이던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된 후 훌륭한 법으로 인민을 가르친 덕분에 영국이 이전보다 번성하고 인구도 증가했다고 본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게으르고 무지하며 독립정신이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들을 개화시키는 것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다. 그리고 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서양인의 관점과 매우 비슷하다.
이승만은 무지한 조선 백성들과 관료들로서는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선 외국과 많이 접해야 되고 배워야 하며 이들과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럴 경우 조선이 위험한 일을 당해도 도덕적인 문명국들이 국제 법을 가지고 항의를 하며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04년에 쓰인 ‘독립정신’에서 나타난 일본에 대한 관점은 모순적인데 동양에서 가장 문명개화된 국가이다.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 이겼기에 조선의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고 본다. 동시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에 대한 야욕을 보이는 국가로 보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의 대한제국’편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 민중은 그것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전쟁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통탄을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심장을 가지고는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다.”, “죽어서 그런 나라의 개라도 되어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서 하루빨리 조선도 일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과 맺은 조약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데에서 굴욕감과 일본의 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선은 일본과 다른 나라에 빚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루바삐 그것을 되갚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을 증오하기만 한다면 조선은 손해를 보고 일본은 이득을 볼 것이며, 그렇다고 일본을 마냥 고마워만 할 수 없다고 하며, 진정 성공하는 길은 조선이 다른 국가처럼 부강해져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개화인들에게 개화는 독립을 위한 조건이라고 보았으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문명관을 받아들여 조선이 빨리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다른 국가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선 역시 일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조선이 문명화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교육이 무척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더 시급한건 조선이 독립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이었다.
영국인이 본 조선
『일그러진 근대』라는 책을 보면 영국이 본 조선을 알 수 있다. 일본이나 청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조선은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인들의 인식에 잡히기 시작된다. 그러나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상상력을 부추기지도 않고, 모험을 자극하지도 않는 산문의 땅”, “빈곤이 어디서나 발견되며 게으름이 국민적 특성인 나라”, “‘근세 중국’에서 ‘중세 중국’으로 옮겨 온 것으로 착각되는 나라‘등으로 표현되었다.
처음 조선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식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았었다.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등으로 잘못 알려지다가 차츰 한국이 한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본에 앞섰고, 중국 다음으로 문명화된 동양 국가였으며, 일본 문명의 많은 요소들이 조선에서 전해졌던 것을 알게 되면서 조선은 ‘문명 퇴화’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조선의 예술품을 보면서 ‘미개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러한 문명국이 야만국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조선인들은 게을렀으며 그들이 입는 흰옷은 ‘여자들이 부지런히 빨래를 하기 위해서’ 혹은 ‘과거에 누리던 영광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표정은 미련하고 뚱하며, 시선은 둔감하고 멍한 채 무관심을 드러낸다.’ 혹은 ‘그들은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고, 소를 몰거나 혹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사색을 즐기는 타고난 철학자‘라는 조롱조의 평을 받는다.
조선 정부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이다. 영국의 정치인 커즌은 1893년 한국을 방문한 후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해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행동에 경악했다. 조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보였고 ’동양적 전제정치‘의 원형이며 ’웃음거리‘ 왕국이었다. 한국 국왕과 지배층은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 지도자들과 비교되었다.
영국 외교관들은 조선의 시급한 개혁이 당면한 우선 과제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무능과 지배층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 영국인들은, 한국인들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보았다. 이런 과제들을 앞두고 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얻으려 한 고종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다.
고종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주일 영국 대사 새토우는 고종이 서울 땅의 1/4을 차지하게 될 새 궁정을 짓기 위해 궁정 주변의 모든 땅을 사려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황제가 하는 “가장 최근의 미친 짓”이라 부른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896년부터 1905년 서울 주재 총영사 및 주한 영국공사였던 존 조든은 독립 협회의 개혁운동에 기대했지만 고종이 “그의 위엄을 건드리는 문제에는 대단히 민감”하다고 관찰하면서, 만약 “이런 문제에 기울이는 관심을 국가 통치에 쏟는다면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애석해하였다. 고종 즉위 40주년 행사에서 조든은 “황제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 한국 궁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하면 로마가 불에 탈 때 네로가 바이올린을 켠 것은 차라리 위엄 있는 행동이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06년부터 주한 총영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에 대해 선하고 타고난 위엄이 있으며 영리하기는 한데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정리하였다. 비숍은 고종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지적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면 좋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성격상 결함은 운명적이라고 내린다.
영국인들은 이런 조선을 “완전 붕괴 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표현하였다. 1904년 이후 조선에 대해선 사실상 모든 기회를 놓쳐버린 것으로 보았고 자체적인 개혁은 불가능한 국가로 보았다. 이런 한국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3천 마리의 소를 키우면서 30년간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는 ‘아우게이아스 왕의 마구간’에 비유되었고 일본이 그 마구간을 청소해줄 적임자로 판단하였다. 1905년 갱신된 2차 영일동맹에서 일본이 한국에 지도, 통제, 보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게 된다.
영국이 조선에게 내린 평가는 지금 우리가 보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가혹하다. 영국의 이러한 관점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와 태평양 전쟁 중 임시정부가 미국에게 국가로서의 승인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미국이 이것을 영국에게 자문을 구하자 영국은 한국인들이 그러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조언하고 미국은 이것을 받아들여 국가로서의 승인을 하지 않았다.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신탁통치를 이끌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영국의 관점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편향된 시선이 밑바탕에 깔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중에서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에 비해 너무나 비교되는 후진국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영국인의 시선 뒤에 숨어있는 ‘박지향’의 관점
우리가 『일그러진 근대』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책의 저자, 역사학자 ‘박지향’이다. E.H 카가 말했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영국인이 본 조선’에 대한 관점은 분명 사실이나 그것을 다시 재구성한 역사학자 ‘박지향’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일그러진 근대』를 저술했는지 알아야 한다.
사실 그녀가 말하는 영국인의 관점은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도 많으나, 대다수는 그녀 역시 암묵적인 동의가 있으며, 동의하지 않는 관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 저자가 이러한 영국인들의 관점 혹은 이야기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저자가 책에서 ‘영국인들이 바라본 조선’을 소개하는 챕터의 제목은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 아이의 나라’다. 이 챕터의 결론은 영국의 소설가 드레이크의 평으로 끝난다.
어떤 민족이 강압적으로 통치 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자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머리말에서는 저자의 의도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던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조차 “아무런 편견이 없는 관찰자라면 오늘날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것은 대체로 구 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관찰은 우리 역사의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비록 한국과 일본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이 편견으로 왜곡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냉엄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도록 하자. 우리 역사의 실패의 책임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게 되는데 이 책이 기여하기를 바란다.
저자는 영국인들의 관점을 통해 조선이 일본에게 흡수된 책임을 일본이 아닌 조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며, 당시 중요했던 것은 외교가 아닌 내부적 개혁이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조선 붕괴의 이류를 외부에서 찾는 민족주의 사학계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외교를 중요시한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개화인들의 관점과도 다르다. 물론 내부적인 개혁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며, 조선이 멸망한 것에 대해 내부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부적 개혁만으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근대화’는 것은 순수하게 자생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유럽에서 만들어진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순간 조선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그러했듯 유학생을 보내고, 외교를 통해 접하며, 그것을 배워와야지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근대화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흥선대원군 이전부터 조선은 이미 국가 시스템이 흔들리는 상황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하느냐’였고 개혁을 통해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였다.
변화는 Modern이 말해주듯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고, 접하지 않는 새로운 것에 대한 방향 설정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근대화 과정에서는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의 전제정치와 남북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조선 역시 고종 및 개화파들은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눈에 접하지 않는 변화를 추진하는 세력도 분열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와 ‘조선이 근대 국가가 되지 못했다.’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식 근대화 혹은 서구화는 추진할 수 없었다. 일본의 ‘천황’처럼 온 국민을 집결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단발령’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주의 세력의 저항이 심한 형편에서 빠른 근대화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당시 최강국이자 가장 근대화가 된 국가가 보았을 때 조선의 내부적 개혁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근대화’는 지금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조선을 살릴 수 있었던 방편인지는 한 번 더 고민해봐야 한다. 당시 강대국들은 ‘근대화’를 이룬 국가들이지만 ‘근대화’를 이룬 모든 국가들이 강국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근대화’가 성공했더라면 조선은 일본에 흡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 하지만, 근대화가 이루어졌는데도 멸망한 국가들도 역사상 그 사례는 너무 많다.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최근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자체가 붕괴하는 것도 소련을 통해 보았다.
조선 역시 ‘근대화’를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근대화’ 자체가 조선의 붕괴를 촉진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 사학계 내부에서는 ‘근대화’는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경로였으나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조선이 붕괴되었다고만 보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이승만 및 당시 개화 지식인들처럼 보편적인 문명화를 추구하면서도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 원했던 일본식 근대화, 서구화, 군사적인 근대화가 이중으로 겹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최전방에 서 있는 ‘박노자’와 ‘허동현’
이번엔 『우리 역사 최전선』을 살펴보자. 이 책은 이상주의자 ‘박노자’와 현실주의자 ‘허동현’의 논쟁 집으로서 저자들의 관점이 전면적으로 앞에 드러나 있다. 이 둘은 모두 ‘근대’가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박노자는 갑신정변의 주체를 ‘폭력과 살육을 서슴지 않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라고 칭하자 허동현은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는 없다고 답한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좀 더 근대화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견해를 알 수 있다. 기존의 사학계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근대화를 늦춘 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박노자는 흥선대원군을 근대화의 잣대로 평가 할 수 없다고 한다.
전통시대의 인물인 대원군에게 왜 일찌감치 서구식 개화를 지향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것은 물고기에게 왜 새처럼 날아다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격이지요. 서구식의 근대식 군사주의 국가 건설이나 자본화가 비 서구 지역에서 꼭 자생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역사의 법칙도 없고, 서구적 근대국가를 선으로 볼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허동현은 이런 박노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조선에서 일본은 어떻게 ‘새’가 된 것일까요?……일본처럼 우리에게도 시간과 기회가 일찍 주어졌다면, 서구 근대가 이식될 수 있었다고 말이죠. …… 당시 민중 물고기들에게 인권과 경제적 생존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잔혹하긴 해도 서구 근대를 따라 하는 것 말고 다른 현실적 대안이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대원군에게 왜 새가 되려 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따져 묻는 것입니다.
저자 모두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박노자의 경우는 한발 더 나아가 서구식 근대화가 꼭 선이며 그것을 따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대신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라는 이상주의적인 근대화를 말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본식 근대화는 상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동현은 이상적인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시대는 먹거나 먹히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가 되어야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근대화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 책만으로 그 둘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관점은 적어도 일반적인 민족주의 역사학계에서 상당히 벗어난 관점이다.
‘근대화’ 담론을 넘어서
한국에서 쌓아져온 ‘근대화’ 담론은 서양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문명화’의 논리와 일본에서 들어온 ‘문명개화’의 논리, 그리고 기존에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오류들이 뒤섞인 이중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개화기 지식인들은 한편으론 영국에서 만들어져 온 보편성의 성격을 가진 ‘문명’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을 넘보고 있는 일본에게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식 ‘문명개화’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에게 병합된 후 일본은 독일식 ‘문화’ 개념을 받아들여 일본식 ‘문화’를 강조하였고 한국 역시 이 영향을 받아서 ‘근대화’의 ‘근대’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상호 모순적으로 접해져 있다.
동시에 조선의 ‘근대화’ 담론은 근대식의 이분법적 논리로 이뤄져 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었던 존재들-독립협회, 갑신정변, 개화파 등등-은 선했던 것이고, 그 반대 세력들-대원군, 위정척사파-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결국 근대 국가에 도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는 다르다. 살아남기 위해선 근대화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근대화가 생존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왜 독일에게 무너졌는가. ‘근대화’ 담론은 이 이유를 설명해주질 못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버금가는 근대화를 이뤄낸 최강대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세계는 누군가를 잡아먹거나, 혹은 잡아먹히는 시기였다. 결국 식민지를 둘러싼 대립은 최강대국끼리의 전쟁으로 이어져왔고 결국 그들 중 대다수는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차 세계대전 이후 살아남은 국가는 미국, 소련, 영국 밖에 없으며 영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과거에 누리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다.
‘근대화’가 조선을 지킬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화’가 반드시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분법적 근대성 논리인 ‘근대화’ 담론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조선 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근대화’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국은 과거 ‘근대화’에 대한 교훈을 계기로 빠른 성장을 이뤘고 결국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한국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한국도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독수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제국주의 시대의 결말을 보면서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얻어야 할 새로운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는 결국 극소수의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로 만들었고, 최강대국이던 영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등국가로 강등되어 버렸다.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지양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근대적 이분법성의 논리인 ‘근대화’ 담론을 넘어선 진정한 의미의 ‘탈 근대적’ 담론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푸른역사, 2003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청미디어, 2008
허동현·박노자,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 by | 2009/11/20 22:42 | 역사. 오래된 미래 | 트랙백 | 덧글(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