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 - 무기를 든 예언자의 실패

 옛날이야기를 할까 한다. 한 때 이탈리아는 빛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세 개로 나누어져 있었고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에게 언제 먹힐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자들은 군주에게 아첨을 하며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있고 군주는 자신의 국가가 피폐하고 위태로운 상황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신의 가장 큰 대리자가 있는 국가에서 이 시기를 극복해 줄 신은 보이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탈리아를 구원해줄 영웅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에게 모함을 받아 화형을 당하고 만다. 무지한 백성들은 관료들과 함께 그를 욕하고 그의 화형식을 기뻐했다.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또 다시 이 나라를 구원해 줄 사람을 보았다. 그는 여우와 같은 교활함과 사자와 같은 카리스마로 자신의 힘을 키워 어느덧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가 이탈리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었을 때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포기하질 않고 이탈리아를 구원해줄 영웅을 기다렸다. 그리고 또 다시 영웅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보였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써 그에게 바쳤다. 그 책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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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tender | 2008/08/17 11:24 | The FILM | 트랙백(1) | 덧글(0)

영화비평 합격

부산국제영화제 공짜다. 우헤헤헤헤헤
솔직히 떨어질 거라 예상했다. 자신이 정말 없었다.
하지만 붙었네. 간신히 붙은 것 같지만.. ^^

by Contender | 2008/08/16 21:48 | 트랙백 | 덧글(1)

‘그날이 오면’ 베스트셀러 목록

 서울대 쪽의 서점 '그날이 오면'이라는 가게의 베스트목록을 보면 아직 한국 사회에는 희망이 있고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서울대라는 생각이 든다. 주식부자 되는 법과 토익책이 요즈음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고 있는데 서울대는 달랐다. 다행히 베스트셀러 1,2위는 나도 읽어본 책이라 뿌듯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어떨까. 우리 학교 앞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들 순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순위가 궁금하다면 아래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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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tender | 2008/08/12 21:44 | 트랙백 | 덧글(4)

풍요한 사회 - 우리는 이미 충분하다.

 요새 영화 '적벽대전'이 크게 인기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다. 삼국지에 "하늘은 이 주유를 낳고 왜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라고 절규하며 피를 토하고 죽는 주유가 주인공이란다. 제갈량한테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이인자 주유가 '적벽대전'에서는 드이더 제갈량을 제치고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2년전이었던가. 미국에서는 거대한 경제학자 두명이 타계했다. 한명은 화폐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적극 설교했던 밀턴 프리드만. 다른 한명은 그런 밀턴 프리드만을 반박하고 현대경제학을 근본부터 비판을 했던 존 갤브레이스. 갤브레이스는 현대주류경제학에서 프리드만에 비해 너무나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언젠간 주유가 제갈량을 제치고 일인자로 표현이 되듯 갤브레이스도 그만큼 빛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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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tender | 2008/08/05 21:57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3)

해석과 진실. 그리고 역사 - 1. 영화비평 수업을 끝내며

전 <파라노이드 파크>를 보고 비평문을 쓰면서 예전에 역사 시간에 들었던 한 질문이 떠올렸습니다. 역사학은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학문이고 해석한다는 것은 그 사실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를 부여 한 순간, 해석을 한 순간 우리는 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마전 한 단체에서 근현대사 역사 교과서를 펴냈습니다. 그 교과서는 이승만을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이승만과는 다르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분단 국가를 수립하고 6.25 전쟁 때 치사하게 도망치고 제주 4 3 사건과 보도 연맹 사건의 주범이었던 이승만이 아니라 나라를 구한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이승만을 보여줍니다. 전태일이라는 한 인물을 누군가는 휴머니즘을 보여준 사람으로 다른 누군가는 민주노총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말합니다. 전자의 이승만과 전태일은 후자의 이승만과 전태일과 다른 별개의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엔 훨씬 더 많은 이승만과 전태일이 있으며 그들은 실제 존재했던 이승만과 전태일과는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한 순간 역사학은 실존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진실을 담으려고 했던 역사학은 결국 그러질 못했고 실패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이 허구를 이야기하는 문학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해석으로 인해 창조된 무수히 많은 이승만과 전태일을 공존시키게 한다면 어떠할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은 역사학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은 반드시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역사가 가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이 것이 역사학이 가지는 커다란 모순이라고 생각하며 역사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라는 것은 '현실'이라는 기차를 타고 있지 않습니다. 감독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세상입니다. 더군다나 <파라노이드 파크>처럼 어떤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둔 허구의 세상에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해석을 옳고 그르냐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해석도 인정할 수 있다는.. 그래서 전 그 여러가지 해석들의 공존을 한 번 보고 싶었고 이 글도 그런 생각 속에서 쓰여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비판을 많이 했지만 사실 저는 이 글에 대해 상당히 만족을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이 좀 더 얻어터졌으면 좋겠고 동시에 제가 그 비판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습니다. 이런 싸움에서 결국 저는 지겠지만 그 자체로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싸움의 패배가 두렵지 않습니다. 전 아직 젊으니까요. ^^

수업 시간에 저의 딴지에 대해서 좋았던 분들도 있고 싫었던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의 생각을 받아들였던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마 후자가 많겠죠?) 하지만 전 어떤 감정적인 생각으로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토론 자체로도 즐기셨으면 좋겠으면 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번 수업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았고 느꼈던 시간인거 같은데 이렇게 끝난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다들 다음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by Contender | 2008/08/04 20:34 | 역사. 잊을 수 없는 | 트랙백 | 덧글(0)

파라노이드 파크 2차 수정문 - 낯설음의 영화

대학교 역사 시간 때 낯설음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낯설음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거나 혹은 생각하지 못한 것인데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며 그 답을 찾았을 때 낯설음을 주는 시대를 이해 할 수 있는 핵심을 얻게 된다고 배웠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은 모두 낯설다. <파라노이드 파크>(2007)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은 왜 이 영화들이 낯설은지 답을 찾아야 한다.

<게리>(2002),<엘리펀트>(2003),<라스트 데이즈>(2005)에서 <파라노이드 파크>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들은 모두 죽음을 주제로 다루고 있어 ‘죽음 사부작’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는 ‘죽음 사부작’보다 ‘소멸 사부작’이라는 단어가 더 낫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죽음 사부작’에서는 캐릭터들의 죽음이 영화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죽음 이면에는 무언가가 소멸하고 있으며 나는 이것이 이 영화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앞의 영화들을 보자. <게리>에서는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린 청년이 친구에게 죽고, <엘리펀트>에서는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라스트 데이즈>에서는 로커가 죽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엔 또 다른 무언가가 소멸하고 있다. 먼저 <게리>를 보자. 두 청년은 젊은 치기에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갈려다 길을 잃게 된다. 처음엔 웃으며 “fuck!”을 말하지만 그 “fuck!"은 점차 진중해지고 그들은 이 사막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점차 잃어버린다. 우리의 인생 역시 그렇다. 처음엔 치기 어린 열정으로 남들과 다르게 살거라고 하지만 점차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그 것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젊은 패기는 사라져버린다. 학생들이 친구의 총에 의해 죽는 이면엔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 공간은 그 이전과 결코 같을 순 없다. 그 이전의 평화는 죽은 이들의 삶과 함께 소멸됨을 보여주는 <엘리펀트>. 한 로커의 죽음과 그가 가졌던 성공과 신화와 그의 모든 것들이 잊혀짐을 다루는 <라스트데이즈>까지 누군가의 죽음 뒤에는 항상 무언가의 소멸이 있었다.

<파라노이드 파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죽음 사부작’ 중 하나인 이유는 한 학생의 떠밀림에 밀려 죽어버린 할아버지가 아니다. 바로 그건 우연히 준비되지 않은 채 파라노이드 파크에 갔다가 사람을 죽이고 변해버린 알렉스다. 사람을 죽이고 난 뒤 알렉스는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와도 소통을 하지 않는다. 소통하지 않는 관계는 가벼울 수밖에 없다. 사람을 죽이기 전 알렉스는 동정녀인 애인과의 섹스에 대해 그녀와의 관계가 더 무거워질까 고민을 하지만 변해버린 알렉스는 그렇지 않다. 그런 고민도 할 필요없을만큼 그녀의 존재가 가벼워진 것이다. 그녀와의 섹스도 가벼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밋밋하다. 그리고 섹스 후 제니퍼에게 이별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아무런 힘이 없는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알렉스는 변해버렸고 그의 예전 모습은 사라졌다.

이렇게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은 누군가의 죽음 이면에 무언가의 소멸을 다루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죽음과 소멸에 대해 어떤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일 뿐이다. 변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닮고 없어져 소멸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소멸됨에 “왜?”를 던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영화들에게 “왜 누군가가 죽고 무언가가 소멸하는가?”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질문일 뿐이다. 대신 “왜 감독은 이러한 죽음과 소멸을 보여주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먼저 ‘죽음 사부작’의 순서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파라노이드 파크>가 마지막 작품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앞의 세 영화들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해석을 하기 위해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또한 죽음에 대한 의미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해석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애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게리>가 후자를 강조했다면 <엘리펀트>는 전자가 강조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라스트 데이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준 커트 코베인이라는 실제 로커의 죽음을 다루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우리들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 그를 떠나보내고 잊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앞의 작품들과 다르게 <파라노이드 파크>는 어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의 영화들과 분명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이 바로 이 ‘죽음 사부작’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 될 것이다. <파라노이드 파크>도 분명 앞의 세 작품처럼 무언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죽음에 대해 의미를 남기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애도한단 말인가? <파라노이드 파크>가 애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우리의 역할이 어떤 대상의 죽음을 애도하는 주체였다면 이 영화는 알렉스라는 허구의 인물을 매개로 하여 우리가 우리를 애도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서 알렉스의 한 때의 모습이 지나간 과거 속에 묻혀 소멸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소멸된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라져 버린 지난날의 우리다. 바로 이 우리가 애도를 받는 우리다.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할 짐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변했고 과거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 어느 순간부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것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도 저 멀리 잊혀져버렸다. 소멸된 그 모습을 <파라노이드 파크>는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다른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역할을 주었다. 관객이 이 역할을 충실히 했을 때 영화는 관객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것이 <파라노이드 파크>가 ‘죽음 사부작’의 다른 작품들과의 다른 점이며 마지막 작품으로서 가지는 의미가 될 것이다.

by Contender | 2008/08/04 20:24 | The FILM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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